이웃 없는 삶의 풍경

퇴근 후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세상과 단절됩니다. 복도에서 스치듯 만난 이웃과 가벼운 눈인사조차 없고, 엘리베이터 안은 침묵으로 가득하지요.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이제 교과서 속 옛말이 되어버렸습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십 가구가 모여 살지만,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것이 아파트 생활의 일상입니다. 편리함과 사생활 보호를 누리는 대가로 우리는 이웃과의 온기를 잃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아파트 공화국’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절반 이상(약 52%)이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높게 치솟은 아파트 숲은 도시의 풍경을 바꿨고, 사람들의 의식까지 지배하고 있습니다. 학군과 편의시설이 갖춰진 대단지 아파트는 성공과 안정의 상징이 되었고, 집값 상승의 경험은 “부동산 불패” 신화를 낳아 투기의 열기로 이어졌습니다. 집은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아파트는 ‘사는(live) 곳’이 아니라 ‘사는(buy) 상품’처럼 여겨집니다. 한 아파트 건설 현장에 걸린 플래카드의 문구처럼,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입니다.”라는 외침이 무색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주거 문화와 삶의 방식도 크게 변했습니다. 가족만의 울타리 안에 안락함을 꾸리는 대신, 공동체와 담을 쌓는 삶이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누구와도 간섭하지 않고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안락한 ‘포근한 감옥’이 현대식 아파트의 자화상이라면, 그 속에 사는 우리는 점차 서로를 모르는 섬들이 되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단절과 고립이 불러온 불안

아파트 중심의 주거 환경은 우리에게 익명성의 자유를 주었지만, 동시에 깊은 고립과 불안을 안겨주었습니다. 각 가구는 철문과 디지털 도어록으로 철저히 자신만의 성을 쌓았습니다. 아이들은 안전을 이유로 집 밖 골목 대신 학원과 집 안에 머물고, 어른들은 이웃을 믿기보다 CCTV와 경비 시스템을 신뢰합니다. 그러나 과도한 고립은 오히려 불안을 키웝니다. 가까운 이웃의 눈과 손길이 닿지 않으니, 응급 상황이나 어려움이 생겨도 서로 돕기 힘듭니다. 실제로 홀로 살던 노인이 숨지고 몇 달이 지나서야 발견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뉴스에 오릅니다. 수백 세대가 한 건물에 살아도 “모르는 사람 일”로 치부되는 지금의 단절된 풍경은 우리의 안전망을 허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웃과 접촉 없이 지내다 보니 작은 갈등도 증폭됩니다. 층간소음처럼 이웃 간에 발생하는 문제를 대화와 양해로 풀지 못하고 법적 분쟁이나 폭력 사태로 번지게 하는 경우도 늘었습니다.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면, 상대를 ‘함께 살아가는 주민’이 아닌 ‘잠깐 머무르다 갈 타인’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이러한 익명성 속에서는 신뢰 대신 경계심이 자리 잡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더 안전하게 살고자 택한 아파트 생활이 오히려 이웃에 대한 불신과 사회적 불안을 키우는 측면이 생긴 것입니다.

게다가 아파트 단지들은 담장을 세워 외부를 차단한 ‘게이트 커뮤니티’로 변모하면서, 지역사회와의 교류도 단절되고 있습니다. 한 울타리 안에 사는 사람들마저 서로 왕래가 없는데, 하물며 바깥과의 소통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결과 각 아파트 공동체는 고립된 섬처럼 자기 단지의 이익에만 몰두하기 쉽습니다. 종종 뉴스에서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주변에 들어설 공공시설이나 복지시설을 반대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 집 값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학교, 어린이집, 임대주택, 심지어 소방서마저 기피하는 사례도 나타납니다.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자리에는 집값을 지키려는 집단 이기주의가 들어서고, 이는 사회 전체의 신뢰를 좀먹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삶을 꿈꾸다

이렇게 사회의 단절과 경쟁을 부추긴 아파트 중심 생활에 대한 반성이 일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주거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 곳곳에서 ‘다시, 함께 사는 법’을 실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동체 주택, 일명 코하우징(Co-housing) 운동입니다. 코하우징이란 여러 세대가 각각 독립된 주거 공간을 갖되 주방·거실·마당 같은 공용 공간을 함께 설계하고 이용하는 협동주거 형태를 말합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지키면서도 “같이, 또 따로” 지내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지요. 1970년대 덴마크에서 현대인의 고독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시작된 코하우징은 현재 유럽에서 널리 퍼져 주류 주거 형태의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0여 년간 크고 작은 코하우징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서울 마포구 성미산 마을의 ‘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소행주)은 국내 최초의 공동체 주택으로 손꼽힙니다. 2011년 소행주 1호에 9가구가 함께 입주한 이후, 현재 서울과 수도권 여러 곳에 2호, 3호… 10호까지 여러 개의 공동체 주택이 둥지를 틀었습니다. 이들 주택에서 가족들은 저마다 집안의 작은 공간을 꾸미면서도, 공동 거실과 옥상 텃밭, 식당과 돌봄 공간을 이웃과 공유합니다. 때로는 함께 식사를 나누고 생활물품을 공동구매하며, 아이를 함께 키우고 노인을 함께 돌보는 새로운 “품앗이 마을”을 이루고 있습니다. 혼자일 때 느끼던 불편과 외로움을 공동체의 힘으로 덜어내는 이러한 주거 실험은, 각박한 도시 생활 속에서 실종된 이웃의 개념을 되살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공동체 주거를 꿈꾸는 움직임은 비단 코하우징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세대와 계층을 넘나드는 새로운 주거 모델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대학생과 노인이 한 지붕 아래 어울려 사는 *‘세대공존형 주택’*을 상상해봅시다. 실제로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젊은 학생들이 어르신과 같은 주택에 살면서 일정 시간 말을 벗해주는 대가로 저렴한 임대료 혜택을 받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어르신들은 더 이상 쓸쓸한 빈집에 홀로 계시지 않고, 청년들은 경제적 부담을 덜면서도 인생 선배의 지혜와 정을 얻습니다. 이런 Intergenerational Housing(세대 통합 주거) 아이디어는 고령화와 1인 가구 시대의 고독 문제를 해결할 유망한 방향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지자체에서 ‘한지붕 세대공감’ 같은 이름으로 비슷한 시도를 시작했고, 주거복지 분야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지요.

계층 통합형 주거, 즉 혼합소득 단지에 대한 논의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가격에 따라 소득 계층이 사실상 구분되어 왔습니다. 고급 아파트 단지와 임대주택 단지가 서로 담을 마주 보고 있지만, 주민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회는 다양한 직업과 계층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데서 나옵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몇몇 도시는 의도적으로 ‘Mixed-Income Housing’ 정책을 도입해 한 단지 안에 고소득 가구와 저소득 가구가 섞여 살도록 장려합니다. 한 건물 안에 교사, 회사원, 예술가, 환경미화원 등이 함께 거주하며, 아이들은 같은 놀이터에서 어울려 자랍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편견이 허물어지고 지역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커졌다는 긍정적인 보고들도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최근 신규 아파트를 지을 때 일부를 공공임대주택으로 포함하는 ‘소셜믹스’ 정책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비록 초기엔 갈등도 있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삶의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자연스레 만나는 환경 자체가 보다 포용적인 사회로 가는 밑바탕이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흐름은 ‘도시 속 마을’, 즉 어번 빌리지(Urban Village) 개념입니다. 첨단 빌딩 숲 한가운데에서도 사람 냄새 나는 골목과 공동체를 가꾸려는 노력인데요. 예컨대 서울의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마을공동체 프로젝트를 운영하며, 아파트 단지나 골목길 단위로 작은 도서관·텃밭·공유 주방을 만들고 공동 행사를 열곤 합니다. 대면 접촉이 줄어드는 디지털 시대일수록 오히려 지역 단위의 느슨한 연대가 소중하다는 깨달음이 퍼지고 있습니다. 거창한 이념 공동체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동네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품앗이 육아 모임을 하거나, 은퇴한 어르신들이 무료로 아이들 숙제를 봐주는 공부방을 여는 식의 작은 노력들입니다. 이러한 **‘마을 실험’**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함께 사는 재미”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집을 삶의 터전으로 되돌리기 위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새로운 삶의 방식을 확대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이웃에게 친절하자고 다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주거 공간 디자인, 정책적 지원, 그리고 문화적 인식 변화가 함께 가야 합니다.

첫째, 물리적 디자인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지난 수십 년간 아파트 단지는 효율과 보안을 최우선으로 설계되면서, 정작 사람 사이의 만남과 교류를 배려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건축가와 도시계획가들이 **‘만남을 설계’**해야 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아파트 동 간 담장을 없애고, 단지 내에 주민 공유 공간을 늘리는 노력이 가능합니다. 어린이 놀이터, 작은 정원, 주민 카페와 같은 커뮤니티 공간을 중심에 두고 주택들을 배치하면 자연스러운 접촉 면이 생깁니다. 복도와 엘리베이터 홀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공간이 아니라 소통과 환대의 장소로 꾸밀 수 있습니다.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도로인 구조보다는, 현관문 앞에 작은 툇마루나 공용 홀을 만들어 이웃과 한두 마디 나눌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식입니다. 또한 소규모 공동주택이나 타운하우스형 단지를 도심에 계획해볼 수도 있습니다. 수백 세대의 거대 아파트보다 열 가구 남짓한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은 마당을 공유한다면, 얼굴 익힌 이웃과 인사하며 지낼 수 있겠지요. 이런 인간적 스케일의 주거 디자인은 공동체 회복의 물리적 토대가 됩니다.

둘째, 사회 정책과 제도의 뒷받침이 중요합니다. 공동체 지향 주거를 개인들의 실험과 열정에만 맡겨두면 확산에 한계가 있습니다. 정부와 지자체가 정책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입니다. 예컨대 주택협동조합이나 공동체 주택조성 사업에 대한 재정 지원과 행정적 인센티브를 늘릴 수 있습니다. 토지 임대부 방식 등을 통해 초기 비용 부담을 낮춰주고, 공동체 건축 전문가의 컨설팅을 지원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또 임대주택을 단순히 공급 숫자 채우기가 아니라 커뮤니티 강화형 주택으로 기획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미 일부 시도에서 공용 식당이 있는 임대 아파트층별 거실을 둔 기숙사형 주택 등의 모델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런 주거에서는 이웃끼리 자연스레 얼굴을 마주치고, 관계를 쌓아갈 기회가 생기죠. 법과 제도도 유연해야 합니다. 현행 건축법이나 주택관리 규정이 지나치게 사생활 보호와 개별 소유권만 강조하고 공용 공간에 관한 창의적인 설계를 제약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더불어, 공동체 갈등 조정 시스템을 마련해 혹시 생길 마찰을 중재하고 협력을 도모하는 지원도 고려할 만합니다.

셋째, 문화적 인식의 전환이 궁극적으로 필요합니다. 공동체 주거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속 벽인지도 모릅니다. 오랫동안 경쟁과 효율만을 좇아온 우리 사회에서 *‘이웃과 함께’*라는 가치는 뒷전이었습니다. 이제는 혼자 잘 사는 삶의 불안과 한계를 직시하고,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과 미디어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학교 교육에서 협동과 공존의 가치를 가르치고, 대중매체에서 새로운 주거 공동체들의 성공 사례와 훈훈한 이웃 이야기를 조명해보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두레, 품앗이, 이웃사촌 같은 전통이 있었습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공동체 주거는 결코 낯선 이념이 아니라, 원래 우리에게 있던 것을 되살리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남 신경 써주나” 하는 냉소를 넘어서, 내 가족의 울타리를 살짝 열어 이웃과 함께 행복을 나눌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변화를 위해 우리 각자의 작은 실천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제도와 환경이 바뀌길 마냥 기다리는 사이에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 만나는 이웃에게 먼저 인사 한마디 건네보는 용기, 온라인 커뮤니티에 숨어서 불평만 하지 말고 입주민 모임에 참석해 의견을 나누는 참여, 아파트 단지의 작은 화단에 꽃을 심고 돌보는 자발적 봉사 등이 그렇습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으니, 내가 머무는 공간부터 공동의 삶터로 만들려는 노력이 쌓일 때 변화는 현실이 됩니다.

함께 사는 미래를 향하여

고독한 편리함보다 불완전하더라도 따뜻한 연대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인간다운 삶의 방향이 아닐까요? 집을 더 이상 성과와 경쟁의 트로피가 아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플랫폼으로 재정의해야 할 때입니다. 아파트라는 콘크리트 숲에 우리가 진정 바라는 인간적 온기를 불어넣지 못한다면, 편리한 둥지에 살면서도 마음 한구석의 허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이제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봅니다. 과연 나는 어떤 집에서 어떤 이웃과 살아가기를 원하는가?

돌이켜보면 우리의 부모 세대, 조부모 세대는 마당을 함께 쓸고 대문을 열어 두며 이웃과 살아왔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비록 시대가 다르다 해도, 결국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임은 변치 않습니다. 고립의 불안보다 연결의 신뢰를 선택하는 용기, 혼자의 성공보다 함께의 행복을 꿈꾸는 상상력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눈앞의 아파트 값 등락에 일희일비하기 전에, 우리 삶의 질과 공동체의 건강함을 좌우할 다음 세대의 주거 문화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파트에 푹 빠져 앞만 보고 달려온 대한민국, 이제는 걸음을 멈추고 옆을 둘러볼 때입니다. 내 곁에 있는 이웃, 우리 동네의 얼굴들을 다시 마주보고 인사 나누는 작은 변화에서부터 *‘함께 사는 법’*은 시작됩니다. 궁극적으로 집은 벽으로 둘러싼 요새가 아니라, 서로 돌보고 성장하는 삶의 터전이어야 하니까요. 다시,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여정에 우리 모두가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사촌이 되는 삶, 그 새로운 공동체 주거의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내딛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