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을 내려다보면 셀 수 없이 많은 사각형의 불빛이 켜집니다. 높게 치솟은 아파트 숲의 창마다 저마다의 삶이 반짝입니다.

어린아이가 숙제를 하고, 가족들은 거실에 둘러앉아 TV를 보며,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돌아온 청년은 책상 앞에 앉아 허기를 달랩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똑같은 아파트 동(棟)들이 빽빽이 늘어선 도시의 윤곽이지만, 그 안에서는 수백만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흐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삶은 이렇듯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높다란 구조물 안에서 영위됩니다. 익명의 이웃들이 층층이 쌓여 사는 수직 도시, 그것이 바로 현대 한국 사회의 일상 풍경입니다.

아파트 없는 한국 사회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파트는 우리의 삶 깊숙이 자리 잡았습니다. 실제로 한국인의 절반 이상, 대도시 인구의 70~80%는 현재 아파트에 거주합니다. 도시를 조금만 걸어봐도 ‘○○아파트’라는 표지판과 높이 솟은 동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별칭처럼,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아파트 중심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한 사회학자는 “아파트를 알면 한국 사회가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아파트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한국인의 꿈과 좌절, 일상과 철학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이 연재의 마지막 편에서는, 아파트 중심의 생활이 한국 사회 전반에 남긴 흔적과 의미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그동안 연재를 통해 우리는 아파트의 탄생과 성장, 그 빛과 그림자를 부분부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경제 구조와 정책은 물론 개인의 심리와 가족 관계, 지역 사회의 모습, 대중문화의 흐름, 나아가 정치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아파트라는 공간이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초상을 종합적으로 그려보겠습니다. 편리함과 효율성으로 도시의 얼굴을 바꾼 아파트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적 가치와 갈등, 문화 현상을 낳았습니다.

한국 사회는 아파트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생활 수준을 끌어올렸지만, 그 이면에는 각종 모순과 부작용도 쌓여왔습니다. 이제 아파트라는 거대한 욕망의 인프라가 한국인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 그 명암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욕망이 빚어낸 경제와 도시

한국 현대사의 경제 성장 서사에서 아파트는 빼놓을 수 없는 주인공입니다. 대한민국에 현대식 아파트가 처음 들어선 것은 1960년대 중반이었지만,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의 막이 오른 것은 1970년대부터였습니다.

정부 주도로 여의도와 강남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시범적으로 건설되고, 인구 집중에 대응하기 위한 주택 정책의 핵심으로 아파트가 떠오른 것입니다. 당시 “잘 살아보세” 구호 아래 진행된 산업화 속에서 많은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왔고 주택난이 극심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높은 밀도로 지을 수 있는 아파트는 최적의 해법으로 각광받았습니다. 1970년대 후반 서울 잠실이나 목동의 논밭이 불도저로 평탄해지고 그 자리에 10층, 15층짜리 아파트 동들이 줄지어 올라섰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민간 건설회사들도 대거 참여하면서 아파트 건설 붐이 일어났고, 1990년대에는 분당, 일산 등 수도권 신도시에 수만 세대 규모의 단지들이 계획적으로 조성되었습니다. 불과 몇십 년 만에 한국 도시의 지평선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들판과 산자락이었던 곳은 어느새 회색빛 아파트 군집으로 변모했고, 도심의 판자촌과 주택가들은 재개발을 거쳐 새로운 고층 단지로 거듭났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체 가구 중 아파트 거주 비율이 한 자릿수에 불과했지만, 2000년대 중반에는 전국 주택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가 되었고 도시에서는 그 비율이 70%를 넘어섰습니다.

믿기 힘든 속도의 변화였지만, 이는 주택 부족 문제 해결과 경제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국가적 프로젝트의 결과였습니다.

당시 지어진 아파트들의 평면을 보면, 중산층 가정의 생활상을 반영한 독특한 구조도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1971년 준공된 서울 이촌동 ‘한강맨션’ 아파트나 1973년 준공된 반포주공단지에는 부엌 옆에 작은 ‘식모방'(가정부 방)이 딸려 있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가정에 가사 도우미를 두는 중산층이 많았기에 등장한 설계였습니다. 아파트가 초기에 보급될 당시에는 이처럼 부유층·중산층 생활을 겨냥한 주거 모델이었던 것입니다.

아파트 건설은 단순히 지붕 아래 사람들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 산업 발전과 자본 축적의 강력한 동력이기도 했습니다. 건설사들은 매년 새로운 단지를 짓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투자했고, 수많은 일자리가 건설 현장에서 창출되었습니다.

은행에서는 가계에 주택담보대출을 공급하며 금융산업이 성장했고, 가구들은 앞다투어 빚을 내어 분양에 뛰어들었습니다. 부동산 시장은 한국 경제의 심장처럼 요동치며 성장의 한 축이 되었습니다.

아파트 분양 광고는 신문 1면을 장식했고, 견본주택(모델하우스)에는 긴 줄이 늘어서곤 했습니다. “내 집 마련”은 중산층의 최대 목표였고, 분양을 받아 시세 차익을 얻으면 단숨에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이렇듯 아파트는 주거공간에 머물지 않고 투자와 투기의 대상으로 격상되었습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아파트는 그 자체로 거대한 부의 저장고가 되었습니다. 소위 ‘부동산 불패 신화’가 굳어졌고, ‘유일하게 가격이 오르는 재산은 부동산, 특히 아파트뿐’이라는 통념이 한국인의 집단심리를 지배했습니다.

청약 경쟁률은 수십 대 일, 수백 대 일로 치솟았고, 인기 지역의 새 아파트는 당첨만 되면 로또에 버금가는 시세차익을 얻는다는 뜻에서 ‘로또 분양’이라는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집을 산다는 행위는 더 이상 단순한 주거 안정의 확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재산 증식의 기회이자 계층 상승의 사다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부모 세대는 기를 쓰고 자녀에게 아파트를 사주거나 물려주려 하고, 젊은 세대는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다는 뜻의 신조어) 대출을 해서라도 집을 사야만 안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집값 상승은 또다시 추가 투자 수요를 불러일으키며 거대한 자산 버블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파트 중심 주거문화는 도시 계획과 지형도 바꾸어놓았습니다. 한강변마다 솟아오른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들, 신도시마다 일률적으로 배치된 수십 동짜리 대단지들은 어느덧 한국식 도시 경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아파트 단지는 하나의 성곽 도시처럼 주변과 단절된 채 자체적인 생활권을 형성합니다. 단지 입구에는 경비실과 차단기가 있어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내부에는 놀이터, 작은 공원, 상가, 심지어 학원가까지 들어서 있어 주민들은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단지 안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는 편의성과 치안 측면에서 큰 이점을 주었지만, 동시에 도시의 공공성을 약화시킨 측면도 있습니다. 과거 골목길과 시장, 마당을 이웃과 공유하던 생활양식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시스템화된 관리와 익명의 거주 문화가 대신했습니다.

아파트 단지들은 저마다 담장을 치고 스스로 섬처럼 존재하면서 도시 전체는 수많은 소규모 요새로 쪼개진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단지 공화국’이라는 신조어가 나왔듯이, 거대한 도시 안에 여러 개의 작은 성채들이 공존하는 형국입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아파트는 현재 한국인의 자산 포트폴리오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한국 가계의 금융자산 대비 부동산 자산 비중은 매우 높습니다.

그중에서도 주택, 특히 아파트에 자산이 집중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은퇴 세대는 퇴직금이나 평생 모은 돈을 아파트 추가 구입에 쏟아붓거나, 자녀에게 증여하여 부의 대물림을 시도합니다.

젊은 층도 주식이나 기타 투자보다 ‘내 집 마련’을 최우선 목표로 삼습니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때에는 이러한 선택이 자산 증식의 효과를 내지만, 거품 조짐이 있을 때는 가계 부채 급증과 경제 불안정의 위험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정부 정책도 부동산 경기 부양과 투기 억제 사이를 진자처럼 오가며 시장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집값이 폭등하면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한 규제가 강화되고 세금이 늘었지만, 그러면 또 거래가 급감하고 건설 경기가 침체되어 불만이 터져나오기 일쑤였습니다.

반대로 완화 정책으로 집값이 다시 오르면 무주택자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이렇게 아파트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한국 경제 정책의 최대 난제이자 국민적 관심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도시 개발 측면에서 아파트 일변도의 주거 공급은 여러 모순을 낳기도 했습니다. 획일적인 고층 건물들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채워지면서, 서울이든 지방이든 개성과 역사성이 담긴 공간은 점차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지방 소도시부터 수도 서울까지 너나없이 ‘○○아파트’라는 이름을 내건 건물들이 숲을 이루니, 처음 방문한 도시에서도 낯설기보다 익숙함을 느낄 정도입니다.

한편 도심의 낙후된 주택 밀집 지역들은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철거되고 그 자리에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과정이 곳곳에서 반복되었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들은 교외나 다른 지역으로 밀려나고, 오랫동안 형성된 지역 공동체는 해체되는 부작용이 일어났습니다.

부동산 가치 상승을 기대하는 투기 자본이 개발을 주도하다 보니, 도시 계획은 공공성보다는 이윤 논리에 끌려다닌 면도 있습니다. 더욱 높고 큰 아파트를 지어 최대의 분양 수익을 올리려는 경쟁은 건축물의 규모와 첨단화를 이끌었지만, 그 그늘에 가려진 골목 문화나 인간적 스케일의 공간들은 사라져갔습니다.

빠르게 경제 성과를 내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그로 인해 도시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놓쳐왔습니다.

이러한 개발 피로감과 단조로운 도시 풍경에 대한 아쉬움은 이제 사회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도심 곳곳에 우후죽순 들어서는 타워크레인과 먼지 날리는 공사장의 모습은 더 이상 미래의 희망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대신 “또 아파트야?”라는 한숨 섞인 푸념과 함께, 어린 세대가 녹지와 마당을 모른 채 자라는 현실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회색 풍경은 바로 한국인의 집단적 열망이 빚어낸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편리하고 안락한 현대식 주거를 원했고, 나아가 그 주거를 통해 경제적 안정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 욕망의 총합이 도시의 지도를 다시 그렸고, 철근과 콘크리트로 우리 삶의 토대를 구축했습니다.

아파트는 한국의 경제 성장의 결과이자 원동력이었으며, 동시에 한국인들의 욕망이 응축된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풍경: 아파트가 바꾼 심리와 가치

한국인의 집에 대한 심리와 가치관 역시 아파트 문화 아래에서 크게 변모했습니다.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마음의 안식처이자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내 집 마련’을 인생 목표로 삼고, 그 집은 곧 아파트를 의미하게 된 지도 오래입니다. 취업, 결혼, 출산 등 삶의 주요 단계마다 아파트는 안정과 성공의 기준점으로 여겨집니다.

예컨대 부모 세대는 자녀가 결혼할 때 혼수보다도 “신혼집은 꼭 아파트여야 한다”고 여기기 일쑤입니다. 아직 경제력이 충분치 않은 젊은 부부라도 작은 아파트 전세라도 얻어야 결혼 생활의 출발선에 섰다고 여겨지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반대로, 부모 세대 중에는 자녀 결혼 선물로 거액을 들여 아파트를 장만해주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렇게 아파트 소유 여부는 개인의 성취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도 직결되어 왔습니다.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것은 일시적인 과도기 취급을 받고, 반드시 자기 소유의 아파트를 가져야 비로소 온전한 삶을 꾸렸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은연중에 퍼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젊은 층은 집 장만을 위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빚을 내거나, 결혼과 출산을 미룬 채 돈을 모으는 등 크나큰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내 집’을 가져야만 사라진다는 강박으로 이어지고, 집 없이는 언제든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처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젊은 세대의 마음 한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한편 대한민국의 전체 가구 중 자가 주택을 소유한 가구의 비율(자가보유율)은 60% 남짓에 불과합니다. 수도 서울의 경우 이 비율이 더 낮아, 절반 가까운 가구는 여전히 자기 집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무주택자들은 오른 집값을 지켜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내 집 마련’에 대한 압박을 더욱 크게 받습니다. 즉, 상당수 국민에게 아파트는 이미 얻은 안락함이라기보다 여전히 쫓아가야 할 신기루처럼 여겨지는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아파트를 둘러싼 심리에는 아이러니한 두 얼굴이 공존합니다. 한편으로 아파트는 현대적 편리함과 안전함의 대명사로 여겨집니다.

두툼한 콘크리트 벽과 이중창, 디지털 도어락과 24시간 CCTV, 경비실이 지키는 폐쇄형 단지 환경은 외부 침입이나 범죄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다는 안도감을 줍니다. 어린 시절 골목에서 뛰놀던 세대조차 막상 부모가 되면 “차 없는 아파트 단지가 아이 키우기 안전하다”며 아파트를 선호합니다.

엘리베이터가 있어 유모차를 끌고 오르내리기 쉽고, 단지 내 놀이터와 어린이집, 학원들이 가까이 모여 있어 양육 환경이 편리하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이렇듯 아파트는 개인과 가족에게 외부 위험을 차단해주는 보호막으로 인식됩니다.

편리한 관리 서비스(고장 수리는 관리사무소에 연락하면 되고, 택배도 문앞까지 배송되는 등)는 맞벌이 부부나 바쁜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입니다. 아파트 생활의 효율성과 안전성은 한국인의 생활양식에 깊이 스며들어, ‘단독주택은 불편하고 위험하다’는 인식마저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보호막 뒤에서는 새로운 종류의 고립감과 스트레스가 자라납니다. 철저히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간은 역설적으로 이웃 간 단절을 낳았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함께 있어도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집 초인종을 눌러 이웃집을 방문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층간소음이나 악취, 주차 문제 등 생활상의 갈등이 생겨도 정작 당사자끼리 얼굴 맞대 대화하기보다 관리사무소를 통한 경고장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의 익명 글로 해소하려 합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옛말이 된 지 오래이며, 많은 아파트 주민에게 옆집은 그저 문번호가 하나 다른 낯선 이일 뿐입니다.

안전과 프라이버시를 얻은 대신 공동체의 온기는 희미해졌습니다.

이러한 단절은 거주자의 심리에 미묘한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수십, 수백 가구가 빽빽하게 모여 사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오히려 사회적 고립감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는 ‘고독의 역설’이라 할 만한 현상입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이웃이 붙어 살지만, 서로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관심도 없으니, 밀도가 높을수록 오히려 더 고독하게 느껴지는 아이러니입니다.

실제로 뉴스에는 종종 독거노인이 아파트에서 혼자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도 오랫동안 발견되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등장합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도 정작 서로에게 무관심한 도시 공동체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들입니다.

현대식 주거가 준 쾌적함과 사생활 보장은 그 이면에 인간관계의 빈곤을 함께 가져온 셈입니다.

반대로, 일부 새로운 아파트 단지에서는 잃어버린 이웃 관계를 회복해보려는 움직임도 나타납니다. 최신 단지들은 피트니스센터, 작은 도서관, 카페, 맘스클럽 공간 등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을 갖추고 입주민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합니다.

입주민 전용 온라인 카페나 단체 메신저방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나름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곳도 있습니다. 특히 자녀를 둔 부모들끼리 육아 정보나 교육 정보를 공유하며 연대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런 모습은 전통적인 이웃 사촌 문화와는 형태가 다르지만, 아파트라는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방식의 사회적 관계망을 만들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관계 역시 같은 단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맺는 한정된 연대일 뿐, 담 하나 밖 다른 계층이나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커뮤니티와는 거리감이 있습니다.

아파트가 한국인의 가치관에 미친 영향은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선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 어느 동네, 어떤 브랜드의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경제적 지위와 심지어 인생의 성취도가 가늠된다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부유층은 강남의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나 한강 조망이 뛰어난 펜트하우스 등에 살며 그 자체로 사회적 위세를 드러냅니다. 중산층은 조금이라도 더 넓고 세련된 신축 아파트로 ‘갈아타기’ 위해 애쓰고, 더 좋은 학군과 입지를 찾아 이사를 계획합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열악한 주거 형태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위축감을 느끼거나 박탈감을 갖기 쉽습니다. 반지하나 달동네 주택에 산다는 것이 알려질까 숨기기도 하고, 심지어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임대세대(공공임대 입주 가구)와 분양세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어느 단지, 몇 평에 사느냐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평가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왜곡된 풍조가 자리잡은 것입니다. 주거 수준이 곧 삶의 수준이라는 등식이 만연해진 현실입니다.

아파트에 대한 집착은 개인의 정체성에도 스며들곤 합니다. “나는 ○○아파트에 산다”라는 말은 단순한 주소 이상의 의미를 띱니다.

특정 단지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 통용됩니다. ‘타워팰리스’나 ‘헤리엇’ 같은 이름은 부와 성공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고, ‘은마아파트’처럼 재건축 기대주로 이름난 곳은 그 자체로 부동산 뉴스의 헤드라인이 됩니다.

건설사들은 ‘자이(Xi)’, ‘래미안’, ‘힐스테이트’, ‘푸르지오’ 등 고급 이미지를 내세운 브랜드명을 앞세워 소비자들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아파트 이름에는 궁전(Palace), 성(Castle), 가든(Garden), 파크(Park) 등 현실과 동떨어진 단어들이 즐겨 붙는데, 이는 평범한 입주민들에게 마치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효과를 노립니다.

실제로 주민들도 “우리 아파트 브랜드 값”을 이야기하며 자부심을 느끼거나, 이사할 때 더 높은 급의 브랜드 아파트로 ‘업그레이드’했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집을 삶의 터전이라기보다 일종의 명품 상품처럼 여기는 가치관이 널리 퍼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파트를 둘러싼 심리는 온통 불안과 스트레스로 점철되기도 합니다. 집값 폭등 시기에 자력으로 내 집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벼락거지’라는 신조어를 씁니다.

평범하게 살았을 뿐인데 몇 년 사이 자산 격차가 벌어져 상대적 빈곤층이 되었다는 좌절감의 표현입니다. 반대로 운 좋게 집을 산 사람들도 마음 편한 것은 아닙니다.

영끌로 대출을 받아 무리하게 집을 구입한 신혼부부는 매달 높은 원리금 상환에 허덕이며, 금리 인상 뉴스에 일희일비합니다. 30년 넘게 갚아야 할 대출 계산서에 마음 한켠이 무겁습니다.

혹시 집값이 떨어지면 어쩌나 노심초사하고, 반대로 너무 많이 오르면 보유세 부담이나 정부의 규제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합니다. 심지어 이웃이 얼마에 집을 샀는지, 우리 단지 시세가 이번 주는 얼마나 올랐는지를 일상적으로 확인하며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평당 가격이 얼마 올랐다는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정부 대책 한마디에 온라인 커뮤니티가 들끓습니다. 이처럼 아파트는 행복의 근원이자 끊임없는 근심거리로서,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깊숙이 자리잡은 ‘부동산 신경증’ 상태를 만들어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심리가 일상 속 작은 행동과 선택에도 배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층수를 두고 민감한 선호도를 보입니다.

보안과 사생활 문제로 1층이나 저층을 꺼리는 경우가 흔하고, 반대로 너무 높은 최상층은 혹여나 발생할 수 있는 누수 문제나 더위·추위, 그리고 층간 소음의 원인이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부담 때문에 선호하지 않기도 합니다.

대신 적당히 높아 전망이 좋으면서도 승강기 이동에 큰 불편이 없는 중층이나 중고층(예컨대 10층 이상 20층 이하 정도)을 일종의 ‘금층’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4층’처럼 일부 사람들이 꺼리는 숫자는 아파트 문화에서도 예외가 아니라서, 간혹 건물에 따라 4층을 건너뛰고 5층으로 표기하거나, 104호를 103A호처럼 바꾸는 사례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집안 인테리어나 가전제품을 선택하는 데에서도 ‘남들 다 갖춘 것’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최신 스타일의 주방이나 거실 리모델링이 유행하면 앞다투어 따라가고, 새로운 스마트가전이 나오면 이웃집에 뒤처질까 서둘러 들여놓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적 성향과 소비 경쟁이 주거 문화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모두 똑같은 아파트에서 비슷하게 꾸미고 사는 풍경은 편리하고 안정적일지 모르나, 한편으로는 개성과 다양성을 희생한 대가이기도 합니다.

결국 아파트가 바꾼 것은 단지 도시의 경관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풍경까지 변화시켜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아파트라는 공간에 안락함과 위신을 투영하는 동시에, 그 뒤편에 도사린 고독과 불안을 함께 감당하며 살아갑니다. 한 채의 집이 더 이상 온전히 개인적인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평가와 심리적 안정을 가늠하는 좌표가 되어버린 현실.

이것이 ‘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속 풍경입니다.

가족의 형태와 이웃의 거리

아파트 생활은 한국의 가족 구조와 이웃 관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주거 환경의 변화는 가족 구성 방식의 변화와 맞물렸습니다.

과거 여러 세대가 한 지붕 아래 살던 대가족 제도는 점차 해체되고, 부부와 미혼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 또는 1~2인 소가족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사회 전반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아파트라는 주거 형식이 그 흐름을 한층 가속한 면이 있습니다.

30평 남짓의 아파트 한 채에 부모와 아이들만 오붓이 사는 모습은 이제 한국 가족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조부모나 친척을 가까이 모시고 살 공간적 여유가 없는 아파트에서는 자연스럽게 세대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청년 세대는 성인이 되면 독립해 결혼 전까지 원룸이나 오피스텔 같은 작은 거처에서 생활하고, 노년 세대는 자녀와 따로 떨어져 자신의 아파트에서 노후를 보내는 모습이 흔해졌습니다.

가족 구성원의 생활 공간이 이렇게 분절되면서, 세대 간 돌봄이나 유대의 전통적 형태도 약화되었습니다. 예컨대 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손주를 돌보기 위해 조부모가 도와주는 이른바 ‘황혼 육아’가 많아졌지만, 주거는 따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할머니·할아버지가 지하철을 타고 도심의 자녀 아파트로 와 손주를 돌보고 밤이 되면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풍경도 생겨났습니다. 공동체 가족이 물리적으로 떨어져 지내면서 생기는 세대 간 거리감과 소외감은 새로운 사회 문제로 지적되곤 합니다.

동시에 아파트는 현대의 부부 관계와 가정 문화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아파트 내부 구조는 전통 가옥과 달리 각자의 사적 공간(예: 각 방)을 비교적 명확히 확보할 수 있게 했고, 부엌과 거실이 같은 층과 공간에 위치하면서 가족 공동의 생활공간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이는 가사와 육아 분담 면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띠기도 합니다. 옛 한옥이나 단독주택에서 부엌은 사랑채와 떨어진 채 여성의 전담 공간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거실과 일체형으로 바뀐 주방은 집안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남녀 구분 없이 누구나 드나드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부엌일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낮아지고 가사 노동의 분담이 어느 정도 촉진되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또한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각자 자기 방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이는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자율성을 존중하는 현대적 가치관과 통합니다. 사춘기의 자녀는 자기 방에서 독립적인 공간과 시간을 갖고, 부모 세대도 자기 취미나 업무를 위한 방을 마련하며, 가족 구성원 각자가 개인 생활을 영위할 여지가 커졌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말하면 가족들이 한 공간에 모여 소통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녁이 되어도 온 가족이 함께 대청마루나 마루방에 둘러앉기보다, 각자 방에서 스마트폰이나 TV를 시청하는 모습이 흔합니다.

아파트가 제공한 개인 공간의 증대는 가족 단위의 결속력을 이전보다 희미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지방의 한 할머니는 손주들이 아파트에서 자라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우리는 어릴 적 마당에서 동네 친구들과 뛰놀고 옆집에서 밥 지으면 같이 냄새 맡고 했는데, 요즘 애들은 그런 추억이 없으니 안됐지요.”

그녀의 말처럼, 세대 간 주거 환경 차이는 생활 경험과 정서의 차이로 이어집니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웃 간 교류의 추억보다는 개인화된 아파트 생활에 익숙하고, 대신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배웁니다.

이는 새로운 세대문화의 탄생이지만, 한편으로 공동체 감수성의 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이웃 및 지역 사회의 양상 역시 아파트를 통해 크게 달라졌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아파트 단지는 담장과 출입구로 외부와 구분된 하나의 소우주입니다.

과거에는 옆집, 윗집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얼굴을 맞대고 지내던 마을 공동체 문화가 있었다면, 이제 아파트 이웃은 같은 층에 문을 마주보고 살아도 서로 이름조차 모르는 사이가 되기 쉽습니다.

층간 소음이나 누수, 엘리베이터 고장처럼 불가피하게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야 할 때에야 비로소 “이 분이 내 옆집 사람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는 말이 전혀 놀랍지 않은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웃 간의 왕래와 정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것은 관리사무소를 통한 형식적 소통이나 온라인 게시판상의 공지입니다. 동네 사랑방 노릇을 하던 골목길의 가게와 노점들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는 대단지 상가 안의 편의점과 프랜차이즈 카페가 대체했습니다.

아이들 역시 집 밖 현관문만 열고 나가면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던 옛날과 달리, 학원에 갔다가 정해진 시간에 놀이터에 모이는 식으로 또래를 만납니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도시 아이들이 흙을 밟거나 풀밭에서 노는 시간이 이전 세대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아이들의 놀이 방식과 감수성도 아파트 중심 생활에 맞춰 변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아파트 이웃 관계가 삭막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일부 단지에서는 주민들끼리 자율적으로 동호회나 소모임을 만들어 취미와 친목을 도모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등산 모임, 꽃꽂이 강좌, 육아 품앗이 모임, 독서클럽 등이 활발히 운영되는 곳도 있습니다. 명절이나 아파트 준공 기념일에 작은 행사를 열어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는 단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들도 대부분 비슷한 경제적·사회적 배경을 지닌 입주민들끼리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친밀함입니다. 생활양식이나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기회는 아파트 안에서 많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도시 아파트 주민들은 엘리베이터에서조차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하루를 보냅니다. 서울의 어느 3만 세대 규모 대단지에 수년간 거주한 한 주민은 “여기서 이사 나갈 때까지 옆집, 윗집 사람 얼굴도 모르고 살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도시 아파트 생활에서 이웃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각자 사생활을 존중해야 하는 타인으로 인식됩니다.

한편 아파트 주민들이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주로 자신들의 재산이나 생활과 직접 관련된 사안에서 결속이 이루어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재건축이나 리모델링 추진 때 주민 단합입니다. 오래된 단지일수록 “우리 아파트 가치 높이자”는 목표 아래 주민 대표기구가 조직되어 움직입니다.

동대표를 선출하고 입주자대표회의를 통해 대외적으로 의견을 내며, 경우에 따라선 시위나 청원 등 단체 행동에 나서기도 합니다. 주변에 혐오시설(예컨대 쓰레기 소각장이나 공공 임대주택)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서명 운동을 벌이고 관청을 압박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 이기주의적 모습은 ‘님비(NIMBY) 현상’이라고 불리며 비판을 받지만, 다른 시각에서는 아파트 주민들이 자신들의 생활 환경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자연스러운 행동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단지 주변에 학교나 지하철역 신설 등 이익이 될 사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청원하고 정치인을 움직여서라도 성과를 내려고 합니다. 이렇듯 이해관계에 따라 뭉쳤다 흩어지는 연대는 전통적인 촌락 공동체의 지속적 유대와는 다릅니다.

겉으로는 서로 교류가 없다가도, 막상 공통의 이익이 달린 문제가 발생하면 일시적으로 하나의 이익집단처럼 움직이는 것이 현대 아파트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어찌 보면 이웃 간의 정의 개념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서 ‘함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로 바뀐 것이라는 씁쓸한 해석도 가능합니다.

아파트 단지 중심의 생활은 나이대별 삶의 모습도 바꾸어놓았습니다. 아이들은 아파트 놀이터에서 보호자의 눈길을 받으며 한정된 공간에서 놀다가 자라고, 청소년들은 사춘기의 예민함을 자신의 방 안에 틀어박힌 채 표출합니다.

중장년층은 재산 증식 수단으로서 아파트에 가장 큰 관심을 두고 분주히 정보를 쫓아다니며, 노년층은 낯선 신도시 아파트에서 사회적 연결망 없이 우울감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도시의 어르신들은 예전처럼 한옥 대청마루에 모여 이웃들과 담소를 나누는 대신, 아파트 커뮤니티센터나 경로당에 모여 TV를 시청하거나 무료 급식을 받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층간소음이 될까 조심스레 억눌리고, 젊은이들의 음악과 열정은 이어폰 속 개인 공간에 가둬집니다. 세대마다 삶의 양상은 달라졌지만, 모두가 각자 문턱을 넘어 타인과 교류하는 데에 소극적인 문화가 공통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아파트라는 물리적 벽이 결국 마음의 벽까지 세워놓은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문화와 미디어 속의 아파트

아파트에 대한 집단적인 열망과 현실은 문화 콘텐츠와 미디어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대중가요에서 “아파트”를 외치며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주말 드라마의 단골 소재는 부유층의 호화 펜트하우스와 서민층의 비좁은 셋방 사이의 대비입니다.

1980년대 가수 윤수일이 부른 노래 <아파트>는 당시 사람들의 주거에 대한 꿈과 동경을 흥겹게 표현해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내 곁에 너를 두고~ 아파트”라는 후렴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지요.

그 시대에 아파트는 막 보급되기 시작한 신생활의 상징이었고, 노래 가사에도 낭만적으로 등장했습니다.

또한 2015년에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1980년대 서울 변두리 골목길에서 이웃들이 가족처럼 지내던 정겨운 모습을 그려 큰 공감을 얻었습니다. 그 드라마 속 배경은 아파트가 아닌 연립주택 골목이었는데, 이를 지켜본 현대의 시청자들은 불과 몇십 년 만에 사라진 이웃 간 정을 향수 어린 시선으로 돌아보았습니다.

마지막 회에 그 골목에 재개발 바람이 불어 이웃들이 흩어지게 되는 장면은, 아파트로 대변되는 도시화가 가져온 그리움과 상실감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21세기의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아파트가 한국 사회의 계층 현실을 보여주는 배경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전 세계적인 호평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반지하 가옥과 부자동네 저택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주거 불평등을 드러냈습니다.

비록 영화 속 부유층의 집은 단독주택이었지만, 한국 관객들은 이를 현실의 강남 고급 아파트나 타워팰리스 같은 곳으로 자연스레 연상했습니다. 그만큼 주거 환경이 계층을 가르는 단면이라는 메시지에 공감한 것입니다.

인기 드라마 <Sky 캐슬>에서도 학벌과 부를 지닌 상류층 가족들이 폐쇄적인 주택단지에 모여 사는 설정이었는데, 이는 실제 현실에서 ‘부촌 아파트 단지’들이 갖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렇듯 스크린 속에 그려진 집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사회적 좌표를 상징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그 주거 형태로서 아파트는 극적 긴장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현대 한국인의 이상적인 삶의 이미지는 대중매체 속 아파트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됩니다. 텔레비전 광고나 부동산 분양 홍보 영상을 보면 넓은 거실 창으로 도심의 야경이나 푸른 공원이 내려다보이고, 세 식구 핵가족이 웃으며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장면이 흔하게 등장합니다.

이는 곧 ‘이런 집에 사는 것이 성공이고 행복’이라는 메시지를 시청자들에게 은연중에 주입합니다. 신문이나 방송 뉴스에서는 매주 아파트 가격 동향과 분양 소식을 다루고, 아침 시사 프로그램에는 부동산 전문가가 출연해 “지금이 매수 적기인가”를 분석합니다.

심지어 연예 뉴스에서는 어느 배우나 가수가 최근 어디 아파트에 얼마짜리 펜트하우스를 장만했다더라 하는 소식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스타들의 집을 공개하는 코너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MBC <나 혼자 산다> 같은 프로그램은 유명인이 사는 아파트 내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데, 시청자들은 그들의 인테리어와 일상을 구경하며 때로는 부러워하고 때로는 동질감을 느낍니다. 이러한 미디어 속 모습들은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주거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형성합니다.

평범한 시청자들은 TV 속 세련된 집과 자신의 현실을 비교하며 한숨짓기도 하고, 언젠가 저런 곳에 살아보겠다는 목표를 세우기도 합니다.

2000년대 초반에는 MBC 예능프로그램 <러브하우스>가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오래되고 열악한 집을 방송에서 새로 수리하고 꾸며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자기 집을 바꾸려는 사연자들의 간절함과 변신 후 환희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안방에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모두가 꿈꾸는 ‘우리 집’의 이상형을 방송을 통해 엿보고 대리 만족을 느낀 것입니다. 그만큼 당대에는 누구나 더 나은 주거 공간에 살고 싶다는 욕망이 컸고, 미디어가 그 갈증을 채워주려 했습니다.

또한 인터넷과 SNS 시대에 ‘우리 집 자랑’ 문화가 자리잡았습니다. 신혼부부들은 힘들게 마련한 새 아파트를 감각 있게 꾸민 뒤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인증 사진을 올립니다.

이른바 ‘랜선 집들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서로의 집을 구경하고 인테리어 정보를 공유합니다. 남들은 어떻게 꾸미고 사는지 엿볼 수 있는 이러한 콘텐츠는 폭발적 관심을 모읍니다.

거실 벽 색깔부터 드레스룸 정리 요령, 베란다 텃밭 가꾸기까지 집과 관련된 노하우가 온라인에서 넘쳐나고, 조회 수를 올리는 유튜버들은 유명 연예인 못지않은 호화 아파트 투어 영상을 찍어 올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화는 긍정적으로 보면 사람들의 주거 공간에 대한 관심과 애착을 높이고 셀프 인테리어와 창의적인 공간 활용을 장려한다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의 생활 수준을 견주며 보이지 않은 경쟁심을 부추기고, 모두가 비슷한 유행을 좇아 획일화된 주거 스타일을 양산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예컨대 한때 전국의 신혼집 거실마다 너도나도 대형 액자 TV와 대리석 아트월, 회색 소파로 꾸며지는 식의 유행이 있었습니다. 개개인의 취향이라기보다 ‘멋진 집은 이렇게 꾸며야 한다’는 집단적 분위기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파트라는 획일적 공간 안에서 삶의 모습도 유행에 따라 균질화되는 또 다른 단면을 보여줍니다.

언론 매체에서 부동산 이야기는 결코 빠지지 않는 단골 이슈입니다. 일간지 경제면을 펼치면 ‘강남 아파트값 ○주 연속 상승’, ‘청약 광풍, 당첨 가점 최고 기록 경신’ 같은 헤드라인이 눈에 띕니다.

TV 뉴스는 아파트 매매 가격지수를 마치 주식 시세처럼 전하며, 정부의 부동산 대책 발표는 톱뉴스로 다뤄집니다. 부동산 전문 유튜브와 팟캐스트에서는 “이번 대책이 시장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거나 “내 집 마련 전략”을 코칭해주는 콘텐츠가 쏟아집니다.

국민 대다수가 주택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이러한 정보에 민감해진 것은, 아파트가 곧 삶의 질과 직결된 현실을 보여줍니다. 집이 단순한 삶의 배경이 아니라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인식되기에, 미디어도 이를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것입니다.

일부에선 “언론이 부동산 불안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역으로 언론 또한 소비자의 높은 관심에 부응해 부동산 뉴스를 양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아파트를 조명하는 시선이 늘었습니다. 문학 작품 속에 아파트 단지에서 사는 사람들의 애환을 그리는 경우가 많아졌고, 사진전이나 미술전시에서는 빼곡한 아파트 창틀과 늘어선 동들의 반복적인 패턴에서 미학적·사회적 통찰을 끌어내기도 합니다.

어떤 사진가는 밤중에 불 켜진 아파트 창 하나하나를 찍어 모아 거대한 도시의 모자이크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창마다 다른 색과 밝기의 불빛이 모여 하나의 예술 작품을 이루는데, 이는 곧 수많은 개별 삶들이 모여 도시라는 거대한 유기체를 구성한다는 메시지처럼 다가옵니다.

또한 최근에는 아파트를 벗어나 다른 삶을 모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주목받습니다. TV 예능 <시골에서 살아보기>나 <한달 살기>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도시의 아파트를 떠나 전원주택이나 한옥에 머물며 겪는 새로운 일상을 보여줍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유튜브 브이로그를 통해 빌라를 직접 수리해 살아보는 도전기, 지방 소도시로 이주한 삶 등이 공유되며 잔잔한 반향을 일으킵니다. 모두 아파트 일변도의 삶에 대한 일종의 대안 찾기라 할 수 있습니다.

“과연 꼭 아파트여야만 행복한가?”라는 물음은 은연중에 많은 이들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고, 문화 콘텐츠를 통해 대리 체험되고 있습니다.

한편 아파트에 대한 냉소나 비판의 목소리도 대중문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단지 풍경을 배경으로 “우리 집 찾아봐라”며 웃음을 유발하는 콩트를 선보이기도 하고, 웹툰에는 층간소음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이웃과 갈등을 겪는 에피소드가 단골로 등장합니다.

공포 영화 <아파트>는 무수히 많지만 서로 고립된 아파트 공간의 특성을 살려 현대인의 소외를 은유적으로 그렸습니다. “닭장 아파트”라는 신조어는 획일적이고 삭막한 고층 아파트 생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냉소와 풍자의 시각은 모두가 아파트에 열광하는 와중에도 그 이면의 그늘을 자각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문화는 사회의 거울인 만큼, 아파트라는 현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비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울에 비친 모습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지, 다른 길은 없는지,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하고 말입니다.

정치, 이념, 그리고 아파트 공동체

아파트는 한국 정치와 이념 지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부동산 정책은 전국 단위 선거 때마다 최대 쟁점으로 떠오르고, “부동산 선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표심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습니다.

어떤 후보는 “집값 안정”과 서민 주거 복지를 약속하고, 다른 후보는 “재산권 보호”와 주택 공급 확대를 내세우며 유권자의 마음을 공략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유권자들의 정치적 선택이 그들의 주거 상황과 맞물리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자가 주택을 소유한 사람들은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인한 이득을 기대하거나 기껏 마련한 내 집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에, 재산세 인하나 개발 규제 완화 등을 약속하는 정당이나 후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집이 없는 세대나 임차인들은 폭등한 집값을 잡고 주거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정책, 이를테면 공공임대주택 확대나 분양가 상한제 실시 등을 내거는 쪽에 지지를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 아파트 한 채를 가졌는지 여부가 개인의 정치 성향을 가늠하는 척도 중 하나가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집 있는 보수, 집 없는 진보”라는 도식이 완전히 맞아떨어지진 않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은 중요한 이념 균열의 한 축임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한국 정부는 부동산 문제를 경제·정치 양면에서 관리해왔습니다.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는 집값 폭등을 잡겠다며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을 내세워 1기 신도시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분당, 일산, 평촌 등 대규모 아파트 신도시를 단기간에 조성하여 4~5년 만에 200만 가구 이상을 공급했고, 그 결과 1991년 무렵 한때 안정세를 찾기도 했습니다. 이는 무주택 젊은 세대에게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겨주어 사회 불만을 잠재우려는 정책이었고, 동시에 더 많은 국민을 주택 소유자로 만들어 중산층 지지 기반을 확대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한국의 수도권, 특히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신도시 지역은 일종의 정치적 스윙보터 지대로 부상했습니다. 이들 지역 주민은 정부의 부동산 정책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선거 때마다 표심을 움직이는 캐스팅보트가 되곤 합니다.

실제로 2020년대 초 서울과 부산의 시장 보궐선거에서는 부동산 정책 실패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노가 표출되어 정권 교체 성향의 투표로 이어졌고, 이어진 대선에서도 청년층의 부동산 좌절감이 중요한 변수로 분석되었습니다.

한편으로 특정 정당은 재건축 규제 완화와 세금 경감 등을 공약해 강남 등 자산가들이 밀집한 지역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다른 정당은 청년 주거 지원과 집값 안정 대책을 앞세워 무주택자가 많은 지역의 표심을 공략했습니다.

정치인들은 선거철에 아파트 단지를 직접 찾아가 간담회를 열고 주민들의 애로 사항을 청취합니다. 어떤 후보는 대단지의 게시판과 엘리베이터에 자신의 공약을 홍보하는 전단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아파트 밀집 지역의 주민 집단은 정치권에서도 하나의 강력한 이해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들의 요구를 외면하면 표를 얻기 어렵다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졌습니다.

이념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주택 문제는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철학을 둘러싼 논쟁과 맞닿아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집은 사는(Live) 곳이지 투기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주거를 기본권이자 공공재로 보는 입장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집이 투기 수단이 되는 바람에 사회 양극화와 주거 불안이 심화되었다고 보고, 정부가 적극 개입해 투기를 억제하고 무주택 서민을 위한 주거 복지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진보적 관점에서는 보유세 강화, 다주택자 규제, 임대차 보호법 강화, 공공임대주택 대량 공급 등이 정책 해법으로 거론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시장 원리에 맡겨야 주택 공급이 늘고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자유시장적 입장을 취합니다. 이들은 정부 규제가 오히려 공급을 위축시키고 시장 왜곡을 가져와 더 큰 문제를 불러왔다며, 세제 완화와 개발 인허가 규제 철폐, 청약제도 완화 등을 통해 민간 주도로 주택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보수-진보 이념 구도와 겹쳐서 한국 사회의 주요 갈등 축이 되었습니다. 특히 2018년 이후 문재인 정부 시절 급등한 집값과 각종 부동산 대책의 여파로, 이전까지 비교적 진보 성향이던 2030 세대 일부가 ‘내 집 마련’의 좌절을 계기로 보수정당 지지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60대 이상 가구주의 주택 소유율은 75%를 넘지만, 30대 가구주는 30%대에 머무른다고 합니다. 이런 차이는 세대 간 부동산에 대한 상반된 입장과 정서를 낳습니다.

집을 가진 부모 세대는 현 상태의 안정을 바라는 반면, 집이 없는 청년 세대는 변화를 강하게 요구하는 식입니다. 이는 아파트 문제가 단순한 경제 현안이 아니라 세대와 계층의 가치관마저 뒤흔드는 강력한 힘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아파트 단지가 곧 정치 공동체처럼 기능하는 모습도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수천 세대 이상의 거대한 대단지 아파트는 입주민만으로 지방선거구의 표심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인구를 지닌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주민들 사이에 자체적인 여론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재건축 연한을 둘러싸고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대형 단지 주민 모임이 집회를 열어 항의하는 경우도 있었고, 특정 후보가 재건축 완화를 약속하자 해당 아파트 단지에서 몰표를 받은 사례도 있습니다.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 입장에서는 이러한 대단지 민심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내 도로 공사나 편의시설 유치 등 비교적 사소한 사안부터, 광역 차원의 도시계획 문제까지 주민들이 집단 민원을 제기하면 행정이 크게 움직이곤 합니다.

아파트 커뮤니티에는 지역 정치인들의 연락사무소 광고나 후원 요청 공지가 올라오기도 하고, 주민 토론회에 선출직 인사들이 참석해 의견을 청취하는 장면도 흔해졌습니다. 이는 마치 아파트 담장 안에 작은 민주주의 사회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다만 그 민주주의는 전체 시민 공동체보다는 해당 단지 주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지역 불균형과 사회적 격차 문제 역시 아파트를 통해 정치 쟁점화됩니다. 서울과 수도권의 아파트 소유자들은 자신들의 자산 가치를 지키거나 더 올리는 데 관심이 크고, 지방 도시에서는 인구 유출로 미분양 아파트가 늘어나거나 주택 가격 정체로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는 양상이 두드러집니다.

이로 인해 “지방은 공동화되는데 서울 집값만 오른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국토 균형 발전 정책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습니다. 정부가 세종시 등 지방에 행정도시를 개발하거나 기업 본사와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을 추진해도, 결국 핵심 인재와 부는 다시 수도권으로 몰린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지역 간의 이런 차이는 정치적 선택에도 반영되어, 수도권 표심과 지방 표심이 부동산 이해관계에 따라 갈리는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더 나아가 개인의 인생 경로에서도 부동산 격차는 중요한 변수입니다.

서울 등 집값 비싼 도시에 부모 찬스로 집을 마련한 청년과, 그렇지 못해 원거리 출퇴근이나 높은 임대료에 시달리는 청년의 삶은 궤적이 크게 다릅니다. 이렇듯 ‘부동산 계급사회’라는 자조적인 말이 나올 만큼, 주택 소유 여부에 따른 격차가 심화되자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도 커졌습니다.

그 해결 방향을 둘러싸고 정치 세력 간에 날 선 공방이 오가는 현실입니다.

결국 ‘벽 안의 국가’라는 표현처럼, 아파트 단지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이해와 욕망을 품은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세계들이 모여 대한민국 전체라는 거대한 모자이크를 이룹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는, 그 모자이크를 어떻게 재배열할 것인지에 달려있습니다. 아파트를 둘러싼 문제는 단순히 집 한 채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와 우리 삶의 철학에 관한 질문과 직결됩니다.

모두가 각자 자기 집 한 채씩 갖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은 사회가 바람직한가, 아니면 집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성숙한 방향인가? 우리의 이념과 정책은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아파트는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와 안락을 선사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고민거리와 갈등의 씨앗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단순히 가격을 안정시키거나 세금을 조정하는 기술적 처방을 넘어, 공동체에 대한 인식과 삶의 태도 자체를 재고하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벽 안의 국가, 욕망의 인프라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양식이 아니라 현대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거대한 인프라이며, 그 속에 온갖 욕망과 꿈, 불안과 모순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아파트 단지는 콘크리트로 지은 물리적 공간인 동시에, 우리의 경제적 야망과 사회적 가치가 쏟아져 만들어낸 상징적 공간입니다.

빽빽하게 높이 치솟은 동들 사이에는 우리가 이룬 것들과 잃은 것들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아파트가 가져다준 편리함과 안전함은 분명 소중한 성취입니다. 수많은 인구를 비교적 짧은 기간에 좋은 생활환경으로 옮겨 놓았고, 현대적인 위생 시설과 난방, 치안 체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아파트 대량 공급은 도시의 슬럼화를 방지하고 국민 주거 수준을 향상시키는 긍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인터넷 망이나 상하수도, 난방 같은 기반 시설을 효율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던 것도 대규모 아파트 단지 덕분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아파트는 한국 현대사의 보이지 않는 영웅이자,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한 든든한 인프라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선명했습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아파트 생활을 누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설명하기 어려운 박탈감과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한편에서는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평생을 저당잡힌 채 고단한 노동을 이어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힘들게 손에 넣은 집을 잃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합니다. 담장 안에서 각자 안전하게 살아가지만, 담장 밖 공동체와 주변 사회에 대한 관심과 교류는 희미해졌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멀리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정작 눈앞의 자산 계단을 오르는 데만 몰두하느라 진짜 멀리 보아야 할 것들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파트에 푹 빠진 대한민국’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깊이 주택과 부동산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아파트는 우리에게 풍요를 꿈꾸게 했고, 동시에 그 꿈의 무게에 짓눌리게도 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룰 보금자리로 여겼지만 때로는 가족을 갈라놓는 재산 다툼의 불씨가 되었고, 이웃과 어울려 살 터전이면서도 도시 속 외로운 섬이 되었습니다. 발전과 성장의 아이콘이던 마천루들이 이제는 피로와 불안의 대상이 된 지금, 우리는 자문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아파트에 매달려 왔는지, 앞으로는 어떤 집과 어떤 공동체를 꿈꿔야 할지 말입니다.

이 질문에 정답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아파트로 대표되는 우리의 삶의 공간을 재평가하고 새로운 균형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 왔다는 점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유대, 개인의 안녕과 공동체의 회복 사이에서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는 우리 모두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높이 쌓아올린 벽을 조금 낮추고, 그 너머를 바라볼 상상력을 가져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벽으로 둘러싸인 국가를 벗어나 주변과 함께 호흡하는 삶, 집이라는 욕망의 인프라를 인간다운 공동체의 장으로 다시 설계하는 노력 말입니다. ‘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의 다음 장(章)은, 어쩌면 아파트를 넘어 진정 사람답게 어울려 사는 공간을 고민하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서울의 밤, 빼곡한 아파트 창들 사이로 스며드는 작은 불빛들은 아직 희망의 가능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 불빛 하나하나에 깃든 사람들의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제는 우리가 그 벽 너머를 함께 바라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용기를 가질 때입니다.

높다란 벽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그 틈으로 이웃의 온기와 햇살이 다시 들어올 수 있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파트에 빠져 달려온 대한민국, 이제는 한 걸음 물러서서 우리 삶의 터전을 성찰할 때입니다.

벽 안의 국가를 넘어,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체의 꿈을 다시 꾸어보아야 할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변화의 실마리는 바로 우리 곁에 있으며, 그 실마리를 잡는 것은 우리 세대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